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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를 찾습니다. (5) 이강덕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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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12일 수요 기도회 설교

 

제목: 기본기를 찾습니다. (5)

본문: 누가복음 5:1-11

 

서론)

 

말씀을 잘 듣는 영적 기본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머리를 비상하게 굴리는 얍삽함이 아니라, 묵묵히 충성하며 부지런히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성실함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유익이 되든 유익이 되지 않든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성도가 지니고 있어야 할 신앙의 기본기임도 명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름지기 성도라면 자기의 영적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하고 성찰하는 자기 인식이 또 다른 성도가 지녀야 할 기본기임을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은 누가복음 5:1-11절에 있는 텍스트를 근거로 한 마지막 영적 기본기를 다루어야 합니다.

아마도 오늘 다섯 번째로 다루게 될 신앙의 기본기는 총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본기임을 미리 선포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갈릴리 호수의 한 지경인 게네사렛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고기를 잡던 그날 수확이 영 형편없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허탕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철수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데 바로 그때 주께서 베드로 소유의 배에 올라타신 뒤에 베드로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우라고 하신 뒤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이가 없는 명령이었지만, 선생님이 말한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합니다.

그러자 밤을 지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했던 베드로의 배는 그물에 걸린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졌고, 급한 나머지 게네사렛에서 고기를 잡던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음을 보고합니다.

이런 기적을 맛본 베드로는 에피스파테스’(선생)로 여겼던 주님께로 가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큐리오스), 나를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8)

베드로에게 이런 신앙고백을 받으신 주님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그 유명한 첫 번째 미션을 전달하십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소명을 받은 베드로는 물론 동업자였던 야고보와 요한까지 반응한 내용을 본문 마지막 절인 11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저는 이 구절에서 성도가 가져야 하는 신앙의 기본기 마지막 요소를 발견합니다.

 

주님을 위해 내 것을 내려놓는 헌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본기는 내려놓음입니다.

영어 성경의 고전이라고 말하는 KJV 번역으로 5: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And when they had brought their ships to land, they forsook all, and followed him.”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기의 배들을 육지로 끌고 와서 정박시켰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린 뒤에 예수를 따랐다.”

그들이 버린 모든 것은 자기들의 배들이었습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소유했던 배의 가치는 상당한 물질적 부를 의미하는 재산이었습니다.

배들이라는 번역은 적절합니다.

원어 성경에 를 의미하는 단어의 복수형인 플로이아배들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세 사람이 버려둔 세속적 재산상의 가치는 부분이 아니라 전부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가령 누가복음 저자는 11절의 말씀을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예수를 쫓으니라

하지만 누가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아주 중요한 것을 삽입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무슨 말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첫 번째 미션을 받은 세 사람은 세속적 가치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는 보고를 독자들에게 누가가 선포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이런 신앙의 결단을 하려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영적 태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내려놓음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지 않고 신앙의 궁극적 여정에 성공하려 한다면, 그건 대단히 질 나쁜 태도입니다.

어제 담임목사 셀에서 우리 교회 성경 공부 스텝의 첫 번째 단계인 이재철 목사 시리즈 2번째 텍스트인 성숙자 반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미 우리 교우 중에는 이 단계를 거친 교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 담임목사 셀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 응답한 성숙자 반첫 번째 반응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새신자반을 섭렵한 지체들이었기에 저자인 이재철 목사의 신학적, 목회적 자세를 맛본지라 성숙자반에 거는 기대가 사뭇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사역을 이끌면서 어제 지체들이 함께 반응한 내용 중에 저 또한 영적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면은 믿음이라는 대체어 10가지를 각 지체가 해석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지체 한 명이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믿음이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이 동반한 것이다.” (이재철, 성숙자반, 14)

이 테제를 만난 지체가 흥분된 어조로 고백하며 결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내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 때만 내 삶에서 드러납니다. (중략) 그러나 많은 경우에, 영광의 구체적인 개념을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에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을 수없이 해도 그 바람이나 기도와는 동떨어지게 우리의 삶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 (위의 책, 15)

흥분된 마음으로 지체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듣고 제가 이렇게 응답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자기를 부분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려놓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 자아와 욕망을 버리는 것이며, 미성숙한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버려두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펜테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포기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적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가 주님의 권리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내 권리를 붙든다면 그것은 정말로 어불성설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것을 포기하고 그 빈자리를 주님의 것으로 채우겠다는 것을 선언하며 걷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39절을 보면 한 여인이 주께로 나와서 주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붓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신약학자들은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라고 정의하지만, 논쟁의 여지는 있기에 더 진도를 나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이 여인이 행한 향유 옥합 깨뜨리기에 대한 반응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14:45절을 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이들이 본 것은 옥합 속에 답겨 있는 향유의 가치였습니다.

그 가치를 한 사람에게 허비한 것에 대한 분노를 표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난하는 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반응하신 내용이 이어지는 68절에서 보고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반대로 주님은 여인을 칭찬합니다.

칭찬하신 이유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사역을 주님은 죽음을 미리 기억하고 장사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의 헌신 사역의 초점이 주님이었다는 것에 칭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라 함은 300데나리온에 목숨을 걸던 내 자아를 주님이라는 가장 소중한 존재로 갈아타는 행위입니다.

보는 눈이 바뀌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오프라 윈프리라는 명성을 듣는 데이스타 기독교 텔레비전 네트워크 창업자인 조니 램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정의를 합니다.

내려놓음의 길, 첫 번째 단계는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또한 당신의 마음에 하나님만이 채우실 빈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조니 램, 남김없이 내려놓음, 바이탈북스, 25)

읽노라면 마음을 뜨겁게 하는 조니 램의 갈파입니다.

누가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내가 내려놓아야만 주님이 그 내려놓음을 통해서 비어 있는 내 공간을 채우시기 시작한다는 믿음이 있는 자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갈릴리로 돌아와 다시 내가 일할 수 있는 재산상의 가치를 남겨놓았다면 그들은 결코 주의 제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제 셀 사역하는 중에 셀 지체에게 이재철 목사가 제시한 믿음의 대체어가 열 가지임을 다시 복기했습니다.

순종, 용기, 하나님께 시선 고정하기, 신실함, 눈에 보이는 구체적 형상, 자기 발견, 자기 가꿈, 자유함, 삶에서 나타나는 일 등등 9가지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담임목사가 생각하는 믿음 중에 마지막 남은 한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위에 열거한 9가지는 믿음의 대체어입니다.

하지만 저는 10번째를 더욱 강조했습니다.

 

믿음은 다루어짐(to be controled)이라고.

 

저는 믿음에 관한 정의 중에 이 정의가 제일 마음에 듭니다.

우리가 민감하게 성찰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다루기 하나님이 나를 다루기

믿음이 무엇입니까?

조금의 여지 없이 후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반면 내가 자의적 도구를 이용하여 하나님을 다루는 것을 미신이라고 합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가 하나님께 다루어지기를 소망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다루면 백전백패합니다.

사도행전 21:8-14절을 읽어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동선을 잠시 살펴보면 밀레도 항구에서 장로들과 작별한 뒤에, 배편으로 두로에 도착합니다.

두로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의 제자들이 바울의 신변을 염려하여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지만, 바울은 정중히 거절하고 돌레마이에 도착한 뒤, 이어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됩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믿음의 대선배이자 사마리아 선교의 물꼬를 트고 교두보를 확보한 빌립 집사의 집을 방문하여 교제합니다.

마침 빌립 집사의 집에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내려왔는데 그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퍼포먼스를 합니다.

이 띠의 임자는 반드시 결박된 상태로 체포되어 이방인의 무리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흉흉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빌립과 주의 제자들이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하고 바울에게 예루살렘행을 또다시 울면서 만류합니다.

이런 우울한 영적 분위기를 감지한 바울이 빌립 집사와 거기에 함께 있던 주의 제자들에게 소리를 치며 상황을 빠져나옵니다.

다시 사도행전 21:13-14절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이 구절을 묵상할 때마다 제게 느껴지는 복잡한 감정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선교의 대부였던 빌립이 가이사랴에 거주하면서 대단히 허약한 자로 전락되었다는 유감과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영성에서 느끼는 감동입니다.

왜 빌립 집사는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는 세속적 가치의 대변자로 변질되었을까요?

가이사랴에서 누리고 있던 안락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4명의 과년한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들 모두는 예언하는 예언자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뭔가가 찜찜합니다.

바울이 빌립의 집을 방문해서 잠시라도 거주하려고 햇던 것은 시집을 가지 않은 딸 네 명과 한 공간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공간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빌립은 안락한 집에 거주했습니다.

추측건대 딸들이 행하는 예언의 능을 이용하여 나름의 부도 창출했음이 분명합니다.

안락함과 부요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빌립은 세속적 안락함을 차지했지만 사도행전 8장에서 사역했던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은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진행되는 바울의 예루살렘 사역을 인지할 리 만무입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 쌓아간 빌립에게 영적인 능력을 사라진 게 당연합니다.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내려놓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을 오롯이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의 영적 기본기는 내려놓는 헌신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월요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모 음식점을 찾았습니다.

일주일 중에 월요일만큼은 저 역시 자유함을 느끼고 싶어서, 간편한 반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샌들을 신고 식당을 찾았습니다.

날씨도 매우 더워지고 있는 형국으로 조금은 염려되었지만 설마, 식당에 교우나 지인이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않고 식당에 들어섰는데, 식당 정중앙에 집사님 가족이 미리 와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 다시 나갈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습니다.

집사님 부부는 이렇게 식당에서 목사님을 만나 대접할 기회가 생겼다고 너무 좋아한 반면, 저는 그날 온통 제 복장에 신경이 서 있어서 식사를 입으로 했는지, 코로 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멍했습니다.

커피까지 대접하겠다는 집사님 부부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하고 식당을 혼비백산 빠져나왔는데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섬기는 교회 지체에게 정장이 아니라, 예의를 갖추지 못한 복장을 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쩔 줄을 몰랐는데 나는 훗날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를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오싹해지는 순간적 감정이 스몄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벗은 몸이나 민낯으로 서지는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수치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담대한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오늘의 삶은 주님께 다루어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루어지려면 나의 자아를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는 것,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기도 제목

 

1) 주님을 위해 내 날 것들을 내려놓는 용기를 주옵소서.

2) 주님께 철저히 다루어지게 하옵소서.

3) 세상의 편리함과 안락함에 함몰되지 않게 하옵소서

4) 처음은 좋았지만, 나중이 좋지 않았던 빌립 집사의 삶을 반면교사 삼게 하옵소서.

5) 내 배들을 청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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