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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기를 찾습니다. (4) 이강덕 202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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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5일 수요 기도회 설교

 

제목: 기본기를 찾습니다. (4)

본문: 누가복음 5:1-11

 

서론)

 

9월 즈음, 예상하고 있는 담임목사와 함께 떠나는 독서 여행 교재는 중세 독일 출신의 영성가였던 토마스 아 켐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입니다.

독서 반원은 물론,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한 번을 섭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너무 귀한 양서입니다.

아 켐피스는 책에서 이 고백을 남깁니다.

제게 선한 것이 있으면 당신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지닌 분명한 생각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당신이 저를 지탱하지 않으시면 힘이 있을 수 없고, 당신이 저를 보호하지 않으시면 어떤 정숙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 홀로 남겨지면 죽음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인도하소서. 그리하면 활기차게 일어설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 124)

아 켐피스의 고백 안에서 짐시 머물렀던 구절은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제게 선한 것이 있으면 당신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지닌 분명한 생각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얼마나 철저한 자기 인식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자기 성찰입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를 아시지요?

물속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를 사모하다가 야위어 죽음에 이른 자기애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속적인 사람들과 달라야 하는 점은 자기를 정확히 보는 자기 인식에 대한 통찰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나르키소스와는 정반대의 속성일 것입니다.

만에 하나, 자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철저히 자기중심적 생각을 고집한다면 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100%입니다.

이런 차원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성도가 가져야 하는 기본기를 네 번째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고도 냉철한 자기 성찰입니다.

 

성찰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풀면 이렇습니다.

省察 즉 살필 과 살필 이 결합 된 단어입니다.

결국 성찰이라는 단어는 살피고 또 살핀다는 뜻을 지닌 단어라는 말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쓴 책에서 성찰에 대한 기막힌 해제가 나옵니다.

불치 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찰이라고 합니다.” (신영복, 처음처럼, RHK, 39)

엄마가 갓 낳은 아이를 얼마나 세밀하게 보았을까요?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도무지 행할 수 없었던 전직 목수가 현직 어부에게 던진 생뚱맞은 명령을 베드로는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누가는 이렇게 밝힙니다.

67절입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기적이었습니다.

자연 체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일을 베드로가 경험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베풀어 준 전직 목수에게 가서 이렇게 행동합니다.

이어지는 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에 베드로가 인식한 예수에 대한 인식이 에피스페테스라는 선생에서 큐리오스라는 로 바뀌었음을 이미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예수에 대한 인식을 바꾼 베드로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갑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알았습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유약하며 초라하며 허접한 존재인지를 말입니다.

이 상황을 인식한 누가는 베드로가 고기를 잡는 기적을 맛본 뒤에 이런 자신에 대한 냉철한 성찰을 통해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자기를 인식하게 된 세밀한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유한성 즉 한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바울이 남긴 여러 가지의 고백을 통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접근할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나누어 보십시다.

로마서 7:1924절을 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런 영적 상태를 인정하고 바로 보는 성찰이 바로 신앙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바울은 양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며 선언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은 충격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제가 민감하게 여기는 것은 누구나 다 이런 정직한 실토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는 자기를 정직하게 인식하는 신앙인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주군께 내 삶을 의탁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4:22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빠질 때 그를 건져주신 주님의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 담론 기사를 만날 때마다 세속적인 불신자들과 무신론적 가치로 무장한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인들이 서로 정서적으로 의견일치를 보는 게 있습니다.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이해입니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자연적 법칙과 순리를 호도하고 왜곡하는 전설이거나, 만들어 낸 허위라고 주장하며 동의하는 불신앙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 출발점이 다릅니다.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물 위를 걸어서 내게로 오라고 하신 분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동시에 베드로가 순간적 불신앙으로 인해 다시 물속에 빠졌지만, 주님이셨기에 그를 다시 건져 올리실 수 있었다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 담론 기사가 오늘 믿음의 후손인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는 교훈이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14:30절을 읽어 보십시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물속으로 빠져 가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절박한 간구를 베드로가 주님께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자신이었지만, 자신에게 그물을 깊은 것으로 가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지금 물 위에 서 계신 바로 그 주님임을 알고 있었기에 베드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면 다시 주님이 자기를 건져주실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단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한 한계를 고백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나는 이런 신앙의 고백이 바로 성도가 지니고 있어야 할 신앙의 기본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내증을 더 나누어 보십시다.

누가복음 189절 이하에 소개되고 있는 그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입니다.

바리새인의 자아 정체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는 영적으로 별로 문제가 없이 선방하고 있다는 교만함이었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반면 세리는 영적으로나 세속적인 본인의 삶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인식의 차이였다는 말입니다.

이 차이는 별 차이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자기를 분명히 알고 있는 세리의 고백은 오늘 베드로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누가복음 18:13절은 말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제가 날마다 기도하는 동역자를 위한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신실한 동역자를 붙여 주옵소서. 종은 종의 한계를 압니다. 무능함과 무지함을 압니다. 하나님, 이런 제게 같은 말과 같은 뜻과 같은 마음과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동역자를 주십시오.”

결코 폼 잡기 위해 행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제게는 절박한 기도 제목입니다.

왜 이런 기도를 드립니까?

교우들에게 진정성을 갖고 고백합니다.

저는 저의 한계를 압니다.

어디까지 가능하고 어디부터 불가능한지를 너무 잘 압니다.

이것을 인정하는데 어언 30년이 흘렀습니다.

이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렴풋이 알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지한 존재인지를.

그런데 놀라운 신비와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부터 주님께서 제게 더 가까이 계신다는 은혜가 제게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부터 하나님께서 더 역동적으로 종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베드로가 주님께 다가가 섰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베드로는 주께 이렇게 토로하며 고백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8)

자기의 한계를 선명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글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없을 때도 지구는 존재했다. 인류가 사라진다고 해도 지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기후 위기와 핵폭탄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려면 인류 전체가 협력해야 하는데, 호모 사피엔스가 그 일을 해 낼 것이라는 확신할 근거가 없다. 그래도 무언가 하긴 해야 한다. 우리 자신 말고는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으니까.”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돌베개, 159-160)

나는 작가 유시민씨의 일갈에 부분 동의합니다.

먼저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지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내가 유시민씨와 같이 걸을 수 없는 결정적 차이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 말고는 누구도 우리를 구할 수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유시민 작가는 나 혹은 우리를 구원할 존재가 나 혹은 우리라고 말합니다.

멋진 말 같지만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나는 선언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나도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결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 인간과 나는 겸손해집니다.

인간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성도가 지니고 있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기본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본기가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연약하오나

나는 연약하오나 주의 권능 크시니

모든 환난 시험을 물리쳐 주옵소서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세상 유혹당할 때 자주 넘어지오나

주님 외에 그 누가 내 짐 대신 지실까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아침 안개와 같이 나의 생명 걷힐 때

주의 인도함 받아 하늘나라 가겠네

주께 더욱 가까이 동행하게 합소서

아무 때나 어디든지 주와 함께 있기 원하네

 

기도 제목

하나님, 나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나의 부족함을 주께서 채워주옵소서.

하나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옵소서.

4주 동안 살핀 신앙의 기본기를 지니게 하옵소서.

(말씀 경청, 성실함, 순종함, 자기 성찰)

하나님, 6월 내 개인의 기도 제목과 교회 사역을 축복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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