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 운영자 | 2024-05-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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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2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지금도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불효의 흔적이 있다면?
2. 찬양 (WORSHIP)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50장 22-26절 ● 제목 : 창세기를 닫으면서
1) 요셉이 형제들에게 남긴 유언은?
2) 요셉의 유언은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3) 적용하기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각 셀에서 영혼 구원 사역을 점검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주마다 노력하기. 2. 전교우 야외예배에 동참하도록 독려하기 3. 환우들을 위해 기도하기. 4. 영성 진보를 위한 팀 나누기 점검하기. ⓵ 불침번 기도회 참석 ⓶ 각 셀원 간의 영적 멘토십 형성 5. 5월 사역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 하기.
본론) 본문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영위했던 요셉의 죽음을 알려주는 구절로 채워져 있습니다. 본문은 요셉이 애굽에서 110년의 삶을 향유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음을 보고합니다. 더불어 그는 아들의 아들 즉 증손자까지 보았음도 보고합니다. 본문 22〜23절입니다.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통상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적 생리 중의 하나는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연수가 110세라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는 요셉의 향유한 나이가 110세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 24:29절도 이와 같은 보고를 합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여호수아의 향유 날 수도 110세라고 보고합니다.
이렇게 고대 근동의 사람들이 원하는 생의 날 수가 110세라고 못 박으려는 시도는 당시 남성의 기대 수명이 불과 45세 정도였기에 110세라는 연수는 장수하는 자들이 받는 엄청난 수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요셉은 복을 받은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육체적인 복을 받은 자이었지만, 창세기 저자는 창세기를 닫으면서 요셉이 받은 이런 육체적인 복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던 또 다른 복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데, 귀담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본문 24〜25절을 만나봅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짜릿한 감동이 임합니다. 요셉이 갖고 있었던 영적 정체성이 이 구절을 통해 보고됩니다. 요셉은 이제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직도 생존해 있는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유언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⓵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형제들의 자손들과 식솔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증조부, 조부, 선친에게 약속했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예언적 유언이었습니다. ⓶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의 가족 공동체를 보호하실 것이라는 유언이었습니다. ⓷나를 이곳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내 유골을 들고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것을 당부하는 유언이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과 자녀들에게 남긴 유언의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함의를 담고 있기에 창세기 여행을 마치는 우리는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훈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중심성을 갖고 있었던 이가 요셉이었음을 알려줍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골을 절대로 이곳 애굽에 영원히 묻히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때가 차면 형제들의 모든 식솔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인도해 내실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자기의 유골도 임시로 이곳 애굽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가나안으로 옮겨 아브라함,이삭,야곱이 묻혀 있는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 것입니다. 그의 유언은 후대에 그의 소원대로 이루어졌음을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서를 통해 보고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 13:19절을 만나보겠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애굽 전역에 내린10번째 재앙,즉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는 재앙을 경험한 바로가 항복하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합니다. 드디어 430년 만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이 보내주신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선두 삼아 애굽을 떠납니다. 애굽을 떠나던 날, 모세는 잊어버리지 않고 요셉의 유골을 가슴에 안았습니다. 요셉의 유골을 안고 애굽을 떠났음을 출애굽기 기자는 기록했습니다. 요셉 유언의 일차적 성취를 보고한 것입니다. 이제 여호수아24:32절을 읽겠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가나안 입성 초기 이스라엘 공동체는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 땅에 묻어 장사했음을 여호수아서 기자가 보고합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은 증조부,조부,선친이 묻혀 있는 막벨라 굴이 아니라, 세겜의 땅에 묻혔을까요? 창세기 48:21〜22절로 답변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세겜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준 분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준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무리해 보면 어떨까요? 교만했던 유년기 시절의 요셉, 그 교만함이 시련의 빌미가 되어 애굽으로 팔려가 지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청년기 시절의 요셉, 하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간섭하심으로 애굽의 제2인자인 총리로 등극하여 나름 치열했지만 편안한 삶을 살았던 중년의 요셉, 그리고 애증의 대상이었던 형제들과 극적으로 화합하고,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아버지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과 사랑하는 가족 모두와 행복한 삶을 살았던 노년의 요셉을 살피면서 요셉 역시 아버지 야곱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삶을 살았고 그는 애굽에서 천로역정을 마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어서까지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고향 가나안에 묻히는 승리의 인생을 살았던 네 번째 족장이었다고 술회해도 괜찮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마지막 장,마지막 단락은 요셉의 행적을 해피엔딩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요셉의 일생은 지옥과 천국을 오고 간 것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의 질곡이 군데군데 있었음에도 창세기 저자가 창세기를 닫으면서 요셉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며 마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지 않겠습니까? 레마로 다시 재강조합니다. 그 원동력은 요셉이 갖고 있었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중심성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이라는 풍요의 땅,자신을 있게 해준 출세의 땅인 애굽 중심성을 갖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속적 출세의 발판이었던 애굽을 영원한 터로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아 있는 형제들에게 분명한 어조로 선언하며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번역으로 창세기50:24〜2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침내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다. 나는 곧 죽습니다.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에게 찾아오시고, 여러분을 이 땅에서 이끌어내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엄숙히 약속하신 땅으로 되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맹세하게 하면서 말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여러분이 이곳을 떠나게 될 때에, 내 유골을 가지고 가십시오.” 우리는 2024년 5월 8일 수요일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젊었기에 당연히 그런 느낌이 있을 수 없었다고 자위할 수 있지만, 이제 노년의 길로 접어든 길목에 있는 저로서 한 가지 부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제 나이의 연배에 들어선 시기에도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저들을 볼 때 어떻게 케어 하는 것이 맞을까에 대한 부심함이 목사인 제게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배출한 걸출한 시인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어록을 나희덕 시인이 자신의 시집에 인용한 것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석수장이에게 이렇게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나희덕,『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 지성사, 48쪽) 이 문장이 담길 공간은 다름이 아닌 묘비입니다. 문득 이 묘비에 들어갈 비문의 글을 보다가 릴케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사무침, 당신을 향한 집중력, 당신을 향한 올곧음, 당신을 향한 흔들림이 없는 분명한 방향성이 준 결과물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토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 당신이 나의 눈을 감겨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아주 가끔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노래 중에 갈릴리 호수를 걷던 베드로의 이야기 안에 담겨 있는 신학적 명제가 나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25〜32절을 읽어 봅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로 빠지게 된 시점에 대한 추론은 대단히 의미 심장합니다. 다시 마태복음 14:29〜30절을 복기합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진 시점은 갈릴리 호수의 물을 보았을 때입니다. 반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의 시점은 예수께로 향하여 갈 때였습니다. 영어 성경 NRSV버전으로 마태복음 14:2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He said, "Come." So Peter got out of the boat, started walking on the water, andcame toward Jesus.” 이 구절에서 눈여겨서 보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를 걸었던 순간의 시간은 그의 시선이 예수를 향하여 있었던 시기였다는 구절입니다. 반면 14:30절은 또 다른 교훈을 주는 구절입니다. But when henoticed the strong wind,he became frightened, and beginning to sink, he cried out, "Lord, save me! 마태복음 기자는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 안으로 빠지게 된 결정적인 단서를 주님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강한 바람을 주목하면서부터임을 서술하고 있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toward Jesus”(예수를 향하여)에서 “noticed the strong wind”(강한 바람에 주목하면서)로 바뀌면서 그는 빠져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고 있는 이 교훈은 오늘 2024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유효한 정도가 아니라, 더더욱 절감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들과 우리의 자녀들과 우리의 상황과 우리의 제반적인 삶의 정황 안에서 사탄이 우리를 공격하는 자세는 대단히 명확해 보입니다. 하나님 중심성을 자기중심성으로 바꾸라는 강요요, 협박이요, 압박입니다. C,S.루이스는 조카 악마에게 조언해 주는 늙은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속삭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라고 믿게만 해 놓으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는 마음을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에겐 무교나 마찬가지니까.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 (C,S.루이스,『스크루테이프의 편지』,홍성사, 60쪽) 신앙에는 중립이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절대적 가치는 주님을 향하는 방향성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입니다. 주님을 향한 방향성에서 이탈하면 그대를 부추기는 수없이 많은 자기 중심성의 유혹들이 마치 하이에나처럼 당신에게 달려들 것입니다. 요셉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방향성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마지막 강해를 통해 주시는 세인 지체들이 마음의 노트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실천 강령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창세기의 문을 닫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인간들을 다시 구원하시기 위해 지속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이런 차원으로 조망하여 창세기의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하심』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일하심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전히〜ING입니다. 그분은 그날이 올 때까지 어제도 일하셨던 것처럼 오늘도 일하실 것이며, 내일도 일하실 것입니다. 주님이 구속사의 완성을 위하여 일하시는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 모두는 구속사의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작은 도구로 계속해서 쓰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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