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 홈 >
  • 세인TV >
  • 주일낮예배
주일낮예배
우리 이강덕 2024-06-08
  • 추천 0
  • 댓글 0
  • 조회 57

http://jcnsein.onmam.com/bbs/bbsView/40/6405063

 

202469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여덟 번째 강해)

 

제목: 우리

본문: 요한일서 2:18-29

 

서론)

 

우리라는 복음성가의 한 소절을 불러 보겠습니다.

1절과 2절만 감상하시기를 바랍니다.

1절입니다.

나 외로움도 견뎌 나가겠소 바보란 소릴 들어도 좋소/나를 비웃는 그 비웃음 들을 주의 사랑으로 받아주겠소/이 모든 것이 힘들다는 것을 주님은 나에게 알려줬소/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넓고 크오 그래서 나는 살아가겠소

2절입니다.

우리 모두 손을 내밀어서 넘어진 형제 일으켜 주세/사람이 살면 한 번 사는 것 걸음 멈추고 생각해 보세/시냇물이 강으로 흘러서 저 바다와 하나가 되듯이/우리는 주안에서 하나 돼야 하오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오

제가 신학대학을 다닐 때, 이 곡은 시대가 시대인 만큼 신학생들이 데모할 때 불렀던 곡으로 유명하기에 대단히 불온한 노래로 낙인찍혀 한때는 금지곡으로 선정된 곡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곡의 가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너무 성서적이고 은혜로운 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는 대단히 복잡한 구조로 엮어진 공동체입니다.

정치적 성향, 지역, 학력, 경제적 소유 재산, 연령, 성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차와 차이를 보이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리도 많고, 사고의 차이로 인해 결코 하나로 묶어질 수 없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교회 공동체가 꼭 지켜야 하는 방향성을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제시합니다.

요한복음 17:21-22절을 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신 주님의 기도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내용이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이듯,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중보 기도를 통해 선언하셨던 내용은 하나 되게 하옵소서!’였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의 특징 중에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이 선명하다는 점입니다.

하나 됨입니다.

이 사전적인 이해가 없으면 오늘 본문 접근이 쉽지 않기에 이 내용을 전 이해로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요한일서 저자가 본문에서 표현한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저와 여러분에게 제시합니다.

 

본론)

 

1819절을 먼저 나누어 보겠습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한일서 저자는 18절 서신의 수신자들을 향하여 아이들아라고 호칭했습니다.

아이들아라고 번역한 헬라어 파이디온은 말 그대로 작은 아이혹은 어린아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니까 번역이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전적인 신약학자인 루돌프 불트만은 자기 주석서에서 18절 첫 단어인 파이디온을 전혀 의미가 다르게 번역했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어린 사람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온다는 말을 그대들이 들은 대로 벌써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습니다.” (루돌프 불트만, 국제성서주석-요한 목회서신, 한국신학연구소, 60.)

어린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을 염려하여 쓴 표현인 듯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해 신앙이 흔들리거나, 심지어는 배교하려는 어리석은 자까지를 염두해둔 표현이라고 불트만은 해석합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교회 공동체, 본문에서는 요한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저자가 다잡이 하기 위해서 어린 사람들아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편지의 수신자인 요한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을 서중석 교수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당한 출교, 박해, 그리고 그로 인한 사회적, 종교적, 심리적 소외감이 요한 공동체 멤버들에게는 가장 큰 당면 문제였습니다.” (서중석, 복음서 해석, 대한기독교서회, 260.)

이 편지를 받는 요한 공동체 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주후 1세기 유대 기득권 종교 집단에게 왕따당하고 따돌림을 당하며, 유대 사회 구조적 틀 안에서 핍박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고통을 당하고 있던 요한 공동체 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습한 이, 삼중의 고통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교우들이 알아야 할 전 이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서형석 박사의 글로 이해를 돕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곧 예수님 재림 전에는 하나님의 큰 대적과 하나님 백성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요한 공동체 구성원들이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큰 대적은 적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큰 대적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 마지막에 다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다음 마지막 때에는 율법 없는 자와 짐승들이 일어난다. 적그리스도들은 예수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아버지를 부인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다. 그들 중 많은 자가 신앙인들과는 아무 것도 공유하지 않았으며, 결국 요한 공동체를 떠났다.” (서형석, 요한 1,2,3-연세신학 백주년 기념 주석, 대한기독교서회, 8990.)

무슨 말입니까?

가뜩이나 유대 사회로부터 축출되어 고통을 당하던 요한 공동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주후 1세기에 팽배했던 적그리스도의 출몰은 적지 않은 이중고를 안겨주었다는 보고입니다.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지만, 요한 공동체라는 이름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들이 공동체를 이탈하기 시작했고, 음으로 양으로 당하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게 공동체 테두리를 떠나 나가떨어지는 일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서신 저자는 요한 공동체를 다잡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늘 텍스트를 기록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탈한 자, 배교한 자, 공동체를 나간 자들을 향하여 몇 가지를 경고하며 교훈합니다.

본문 2223절을 읽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 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적그리스도’(안티크리스토스)라는 단어는 요한서신에만 등장합니다.

이렇게 독특한 단어인 적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서 박사의 일견으로 다시 한번 도움을 받아 보십시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은 유대적 분리주의자들이거나, 그리스적 영지주의자 모두일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로마제국이라는 요소를 하나 더 첨가한다면, 로마제국의 황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의 범주에 속한다.” (서형석의 위의 책, 93)

그렇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만 국한하여 논한다면 적 그리스도의 부류는 유대교인들, 헬라 지역에 만연했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함몰된 자들, 그리고 로마 황제 신봉자들로 좁힐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02469일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강력하게 타격하는 적 그리스도는 누구이겠습니까?

담임목사는 이렇게 부침하며 선포합니다.

 

세속화를 부축이는 일체입니다.

 

여타 다른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세속 도시라는 개념과 세속주의(혹은 세속화)’는 반드시 구별해야 하는 개념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과 맞물렸기에 한 번 더 새겨보겠습니다.

세속 도시라는 개념은 교회 공동체가 주목해야 하는 개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속 도시는 이미 주어진 현대인들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세속 도시는 가치 중립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 도시는 선과 악의 개념으로 이분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버드 신학대학원에서 종교학을 가르친 하비 콕스 교수가 했던 말을 귀 담아 들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 집중된 하나님 나라는 신과 인간의 협동 관계가 역사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다. 세속 도시를 만들어 내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우리 시대의 이러한 현실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방법을 보여준다,”(하비 콕스, 세속 도시, 문예출판사, 184.)

무슨 말입니까?

세속 도시라는 현대인들의 운명적 공동체는 배격하고 거부해야 장소가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가야 하는 장소라는 말입니다.

저는 하비 콕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제천에 살고 있는 교우 여러분!

제천이라는 도시가 사탄의 세력에 완전히 잠식된 구제 불능의 어둠 그 자체의 도시라고 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천이라는 세속 도시는 저와 여러분이 섬김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를 만들어 가도록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복음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제천 도성을 섬겨야 하는 것이 우리의 미션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까?

세속 도시가 사탄의 궁극적인 목적인 세속주의에 함몰되어 가는 소위 말하는 세속화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로 경계할 일은 세속 도시가 아니라, 세속화되고 있는 현상입니다.

21세기를 사탄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는 일체가 무엇일까요?

오늘의 적그리스도입니다.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기사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사사기 19:16절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그의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기뻐하니라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의 사위에게 이르되 떡을 조금 먹고 그대의 기력을 돋운 후에 그대의 길을 가라 하니라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이 본문은 사사시대의 최대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기브온 범죄의 출발을 알리는 기사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던 어떤 레위 사람이 매춘의 죄를 짓고 친정집으로 도망간 젊은 아내가 그리워 베들레헴에 있는 처가를 찾았다는 보고로 이 기사는 시작됩니다.

베들레헴이 친정인 이 여자는 레위인의 필레게쉬였습니다.

즉 둘째 부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여자는 매춘하며 간음을 일삼은 여인으로 여겨집니다.

이 부도덕한 여인이 남편에게 도망 나온 지 4개월째가 되는 어느 날, 남편 레위 사람이 불시에 자기를 찾아온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를 안 젊은 아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아주 태연하게 자기 남편을 친정아버지에게로 데리고 들어갑니다.

이윽고 장인은 죄를 지은 딸을 찾으러 온 사위를 보고 크게 기뻐하며 무려 5일 반나절 동안이나 사위를 극진히 대접하는 장면이 49절에 등장합니다.

아마도 사위의 방문을 받은 장인은 좌불안석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이나 예외 없이 죄를 지은 딸 가진 부모의 공통적인 을의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추론에도 불구하고 장인과 사위 간에 벌어진 일을 자세히 보면 참 난감하기가 그지없습니다. 4, 6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장인 곧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를 머물게 하매 그가 삼일 동안 그와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하다가” (4)

두 사람이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니” (6)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찾아온 레위 사람이 그의 장인과 함께했던 일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이었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5일 동안 행했던 일의 전부가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실, 정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됩니다.

적어도 아내를 찾으러 온 레위 사람은 그동안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하여 장인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며 따져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아내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불륜을 저질렀고, 그로 인하여 심각한 가정의 문제를 일으켰기에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정신적, 가정적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더불어 레위 사람은 아주 강한 어조로 죄를 지적하고 재발 방지를 장인에게 약속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경우에 따라, 물리적인 부분의 압력을 가함으로써 남편의 권위를 보여주어야 했음이 마땅했습니다.

한편, 장인은 딸을 잘못 키운 것에 대한 일말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정중하게 사위에게 사과하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더불어 딸을 철저하고 따끔하게 교육해 이런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 표명을 했어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래야 형식적이라도 서로 간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949절까지의 본문을 읽고 또 읽어보아도 그런 종류의 발언이나 대화는 전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재론하지만 장인과 사위 간에 행했던 일은 먹고 마시고 잔 것이 전부입니다.

왜 죄를 묻고 따져서 사과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는 긴장감이 전혀 없는 것일까요?

간음이나 매춘이 죄라고 인식되지 않았던 랜덤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랜덤의 삶은 사사 후기시대가 갖고 있었던 세속화의 단면이자 민낯이었습니다.

오늘의 적그리스도는 죄를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무감각입니다.

다시 말해 세속화의 절정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선교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이렇게 갈파했는데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죄가 사람의 양심을 타락시키고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면, 스스로 선한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악한 일을 저지르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을 지속적으로 살해하는 자가 되게 한다.” (레슬리 뉴비긴, 죄와 구원, 복 있는 사람, 4748)

그렇다면 이런 세속주의와 세속화라는 21세기 적그리스도와 맞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답을 오늘 설교에서 찾습니다.

본문 242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저자는 강력하게 권면하며 선포합니다.

기름 부음이 넘쳐나는 공동체 안에 거하라고.

저 역시, 요한일서 저자의 권함에 동의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이 공급되는 곳입니다.

그 은총은 위로부터 내리시는 기름 부음입니다.

이 기름 부음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영역에서는 맛볼 수 없거니와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의 것이며, 선물입니다.

저는 아침 묵상 시간에 교우들에게 공급할 말씀의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독서 여행을 떠나는 목요일 아침 시간에 묵상했던 성서 일과는 시편 13056절이었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기름 부음이 솟구쳤습니다.

너무 벅찬 기름 부음을 경험하고 그날 묵상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인이 고백을 듣노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어린 시절,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가는 길이 행복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옆에 끼고 올라가는 그 삶이 너무 좋았다. 성장하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의 직을 갖고 평생을 달렸다. 목사가 갖는 자괴감은 이런 처음 마음이 목사가 된 이후에도 여전하냐고 물을 때, 그 삶의 감사가 직업화되었다는 데에서 오는 아쉬움이 크다는 점이다. 시인이 말한 그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고,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린다는 고백이 꿈틀거리고 있는가? 목사로 살면서 나는 이 질문 앞에 선명하고 냉철하게 서 있다. 매일 그렇다. 더불어 이런 목사가 되기 위해 나를 쳐서 복종한다. 둔감하지 않으려고 한다. 둔감이 곧 타락임을 알기에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친다. 성전으로 올라가며 시인이 불렀던 노래가 오늘 나에게도 유효하기를 기도하는 이유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 영혼이 주를 기다리는 것이 더 간절하다고 고백한 시인의 읊조림이 나를 타격하는 아침이다.” (66, 아침 큐티 노트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이 기름 부음이 공급되는 공동체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역설했습니다. (2427)

나는 요한서신 저자가 이탈하지 말고 거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그 공동체를 설교 제목인 우리라는 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예배하는 교우들이 우리공동체 안에서 이탈하지 않으면 기름 부음은 공유될 것이며 이 기름 부음을 공급받는 교우들은 21세기 적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어 한 소절 나누고 기도 하겠습니다.

간혹 물가 빈터에 세운 운동장에서/축구 경기를 보며 함께 소리를 지르고/함께 날개를 세우는 군무를 볼 때도 있고/몇 해에 한 번은 어두운 하늘에 촛불을 밝히고/몇십만 마리씩 무리 지어 나는 새 떼들의 흐르는 춤을 볼 때도 있다/새들이 추는 춤은 군무가 제일 아름답다/독수리가 되어야 살아남는 건 아니다/가창오리나 쇠기러기들도 아름답게 살아간다/그들도 자연의 적자가 되어 얼마든지 씩씩하게 살아간다.” 나희덕, 유리병 편지안에 도정환의 군무에서, 나라말,18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들도 무리가 노래하고 떼 지어가는 모습은 아름답기가 그지없습니다.

하물며 인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나는 세인 교회가 우리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세인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공동체이기를 기대합니다.

21세기 적그리스도들이 산재한 오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우리 세인 공동체 안에 거하여 안전한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당연하다 이강덕 2024.06.15 0 50
다음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강덕 2024.06.01 0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