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9:9-31
제목: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서론)
약 한 달 전에 신학교 동기가 주간을 맡고 있는 환경 보호 전문 업체의 계간지에 기고한 글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따른 현직 목회자의 一說
정치는 정치인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 세간은 그쪽 영역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가타부타하지만 정치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가야 하는 필요악이기에 꼴이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것이 정치다. 나는 레오 톨스토이가 한 말에 동의한다.
“국가권력의 토대는 물리적 토대다.”
정치인들이 들으면 핏대를 세우며 부인하겠지만 양보할 수 없는 마그나카르타와 같은 정치에 대한 적절한 정의다. 그것이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국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물리적 토대가 기초가 되지 않으면 그 존재 자체가 유명무실하기에 톨스토이의 갈파는 정당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목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위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지지하는 정당이 있고, 정치인이 있는 건 성직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철저한 개인의 소견이어야 한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그것이 예의이고 성직자가 지켜야할 품위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피력한 프란체스코 교황의 일갈처럼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8월 24일, 일본이라는 나라가 2011년이 일어난 후쿠시마 일대 지진으로 인해 폐허가 된 후쿠시마 원전이 축척해온 방사능 오염수를 드디어 태평양으로 방류하기 시작했다. 내 생애의 여정 중에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에 대해 대단히 아프고 아프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아픔은 정쟁을 수단으로 삼는 정치인들의 얍삽한 정치공학적인 도식과 함수관계에 기인한 아픔이 결코 아니다. 내 아픔은 신학적 고통이자, 아픔이다.
요한계시록 8:8-9절의 분위기는 대단히 음울하다. 공동번역으로 읽어보자.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서 바닷물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속에 사는 피조물의 삼분의 일이 죽고 모든 선박의 삼분의 일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일곱 인을 떼자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부는 순간마다 일어나는 재앙의 묘사가 그 어느 때보다 피부에 와 닿는다. 특히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일어난 재앙의 내용은 오늘을 사는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요한 장로는 바닷물의 1/3이 피가 되고 그 바다 속에 사는 피조물의 1/3이 죽는 재앙을 예고한다. 혹자들은 이 예언의 내용이 전 천년설 혹은 후 천년설의 교리에 합당한 메시지인가를 놓고 설전을 벌인다. 유구무언이다. 계시록 8장의 교리적 배경이 무엇인가를 놓고 쓸데없는 낭비를 하거나 들먹이지 말고, 바닷물의 1/3이 죽고, 그 안에 살고 있는 1/3의 피조물이 죽는다는 성경적 묘사에 천착하자. 왜? 계시록 8:8절이 2023년 8월 24일, 이 땅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몽과 절묘하게 오버랩 되고 있기에 그렇다. 작금, 바다가 죽고 있는데, 그 죽이는 당사자들은 그 기개가 보무도 당당하다. 너무나도 뻔뻔하다.
북극의 빙하가 금세기 안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비극적 보도가 연이어 나오는데, 이로 인해 마지노선으로 그어져 있는 3,5%의 염도가 희석되어 바닷물이 민물 化됨으로 지구는 더 뜨거워지고, 해수면이 육지면보다 더 높아짐으로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은 더 감소되고, 수없이 많은 기후 재앙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인간은 이 땅에서 여전히 바닷물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게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무지는 인간 교만의 압권이다.
얼마 전, 정부 여당관계자가 공영방송에 나와 태평양은 후쿠시마 원전에서 흘려 내려 보내는 핵물질을 품지 못할 만큼 마음이 졸렬하지 않다고 개그 콘서트를 했다. 진짜로 무식한건지, 순진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렇게 해야 본인이 당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순간, 불쌍하기까지 했다. 이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드신 자연이 더 이상 참지 않을 때가 왔음을 凡夫인 나도 느끼는 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은 무사태평이다.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바닷물 죽이기 현상이 마치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 현상이 아닐까하는 긴장감이 내게는 강력하게 조명되어 몹시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종말을 부추기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나는 인간의 편에 서고 싶지 않다. 더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철저하게 자연의 편에 서 있다. 자연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도 참을 만큼 참았으니 말이다. 자연에게 더 참아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후안무치다. 강을 썩게 만든 4대강 공사 때도 나는 정치적 함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보기에 좋았던 자연을 토목 공사로 망쳐놓는 그 천박함 때문에 반대했다. 역사가 기록한 2023년 8월 24일에 전격적으로 진행된 바다를 썩게 한 범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인간의 몫이다. 지금 그 책임의 선두에 일본이 있다. 역시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치인들은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불행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나를 실망시키는 일을 행할 것이 자명하다. 더 아픈 것은 설상가상으로 이런 일본에게 다시 처절하게 패배하고 있는 이 나라의 몇몇 권력자들의 아둔함에 경악을 표한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인 나는 슬프고 아프다. 아직도 일본이 우리를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배제한다는 서명 란에 잉크는 여전히 유효한데 미친 듯이 일본을 향해 구애하는 이들이 이 땅의 권력을 잡고 있어 참담하다. 사정이 이런 데도 올림픽 도로와 강변북로에는 렉서스와 혼다가 달리고 있다. 유니클로 제품은 언제 ‘NO JAPAN’을 노래했냐는 듯이 다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고 있다. 이 참담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오늘도 태평양 바다로 오염수 460톤은 흘러갈 것이다. 자랑스럽게.
목사로 지난 35년을 살아왔습니다.
목양의 현장과 삶의 현장에서 겪는 아픔과 자괴감을 표현하라면 배은망덕을 볼 때입니다.
주신 은혜, 감사의 조건, 쓰러지지 않도록 시분초마다 붙들어 준 인도함을 언제 그랬냐는 투로 등 돌리는 경우와 맞닥뜨릴 때 오는 절망감은 이론으로 표현 불가입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왜 은혜를 망각할까?
아마도 불편한 것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잊어버리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함의를 내포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생각하는 신앙의 노선에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본론)
히브리서 1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저자는 배교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직격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어보십시다.
“여러분은 죄인들의 이런 증오를 몸소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용기를 내십시오.”
대체적으로 ‘생각하라’는 단어로 헬라어 ‘아날로기조마이’를 번역했습니다.
동의하면서 ‘생각하라’는 단어를 오늘의 언어에 맞게 번역한 버전을 찾아보니 역시 ‘메시지’ 번역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지거든, 그분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 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힘차게 솟구칠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생각하라’라는 단어를 ‘되새기라’ 혹은 ‘살펴보십시오.’라고 재 번역했습니다.
적절한 해석이자 번역이라고 저 역시 동의했습니다.
성도가 지칠 때, 다시 힘을 얻게 하는 영적 동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셨던 일체의 고난 받으심을 다시 되새기는 일입니다.
다시 주님의 그 일하심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느헤미야 9:5-37은 바사에서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복기하면서 밝혀진 내용에 대해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⓵ 나의 삶의 영원에 잇대어 있는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⓶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분이 야훼 하나님이심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⓷ 하나님은 나와 당신을 창조하신 주인이심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⓸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⓹ 하나님은 우리들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5가지의 찬양의 이유를 주신 분이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신 분인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느헤미야 저자가 피력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신 내용이 출애굽 역사였음을 밝힙니다. (9-12)
이어 13-14절에서는 율법을 주신 것을, 더불어 15절에서는 만나와 물을 주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주셨지만, 선조들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심지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음을 여지없이 고백합니다. (16-18)
이런 열조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야훼께서는 자비하시고, 긍휼히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사랑이 많으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멸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셨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19-21)
이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만드시고 보호하셔서 광야에서 적들을 이기게 하셨고, 특히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기사 그대로 가나안의 터줏대감으로 있었던 아모리 족속의 왕이었던 시혼과 옥을 물리치시게 함으로 궁극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였음을 23-25절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두 손 들고 하나님을 찬양해야함이 마땅한데 대단히 아프게도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배신하였다고 26절은 고발하고 있고,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기 위해 가나안의 족속들에게 핍박을 받게 하셨지만 사사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다시 구원하심으로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프로젝트는 이스라엘의 핍박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27-28절은 알려줍니다.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등을 돌리고 실망시키자 거의 마지막 방법으로 예언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셔서 경고와 경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자 하나님은 이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다시 이스라엘을 새로운 애굽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하셨고, 그곳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셨다는 술회까지 오늘 본문 29-31절이 거짓 없이 적나라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29-31절은 이 글을 읽고 있는 내 심장을 떨리게 하는 감동으로 이입됩니다.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경계하셨으나 그들이 교만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에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포로 귀환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해 낸 것입니까?
아팠던 과거, 죄악, 심판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놓고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들의 선조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셨고, 보호하셨고, 구원해 내신 야훼 하나님을 기억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제 2의 수모를 당한 끝에 극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손들은 일체의 과거에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을 묻어버리지 않고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 본문 이해를 통해 오늘 주일에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 신앙생활이란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24-25절을 소개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성만찬 예식 제정의 성서적 근거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누가복음 22장과 마가복음 14장에 기록된 그대로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들은 너희들을 위하여 흘리는 내 피고, 찢길 내 몸이라고 선언하셨던 성만찬 예식을 다시 복기하면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전했던 단어를 사용합니다.
“기념하라”입니다.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원래 원문에는 ‘기억’이라는 명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서공회 번역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기념하라’는 동사로 해석한 단어입니다.
우리나라 성경 번역에는 상당수 ‘기념하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이 단어의 본래 뜻은 ‘기억하다’라는 의미가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앞에 서술한 고린도전서 11:24-25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원문에 더 가깝게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위로하신 일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신 일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베푸신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송두리째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나를 위로하신 일을 깡그리 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져주신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서 일어났던 부흥회 결과 가장 아름다웠던 결과물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조들이 망각하고 잊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서안에서 여러 차례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잊지 말라
조금 길지만 오늘 설교에 관련된 가장 적절한 메시지인 것 같아서 인용하겠습니다.
신명기 8:11-20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지난 주간에 강단이 너무 오랜 동안 꽃이 없이 허접하다는 생각을 아내가 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화분이라도 새로 구입해서 분위기를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다고 청해서 원주를 다녀왔습니다.
화훼단지에 가서 그냥 한꺼번에 사오면 되는데 아내가 한 푼이라도 아끼겠다고 화분만 판매하는 곳 따로, 꽃만 판매하는 화원 따로 방문해서 각자 구입한 결과물을 지금 여러 교우들이 강단에서 보고 있습니다.
두 번 째로 방문한 화훼단지에서 아내가 겪은 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오셨어요. 오신 지 5-6개월은 족히 되는 것 같은데요?”
아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부활절 강단 장식을 위해 다녀온 후 처음이니까, 화훼단지 사장의 말이 정확하다는 것은 알고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장사는 저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게 맞아요. 어떻게 나를 기억했는지 깜짝 놀랐어요.”
경영인의 정신은 소비자를 기억해내는 정신입니다.
그게 성공하는 기업인의 마인드입니다.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의 취향, 구매 욕구 등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정신으로 살아가는 경영인이 경영에 실패할 리 없습니다.
전북 익산에 거주하는 지인 권사님이 매주 우리 교회 설교를 듣습니다.
지난 6월 4일 주일 ‘영성이 있습니까?’라는 제하의 주일 설교를 시청하고 제게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지금 필요한건 영적인 예민함과, 영성입니다. 저도 깊은 영성을 소망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늘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저희 집에 가꾸는 밭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는 밭에 있는 야채들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늘 묵상합니다. 그렇게 영성을 키워갑니다. 목사님, 은혜로운 말씀 주심에 감사합니다.
지난 9월 10일 주일 설교인 ‘어떻게 찬양하지 않을 수 있나(1)’를 영상으로 시청하고는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말씀 잘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고, 또 나를 만들어 가시기에 지존하신 주님 이름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남은 시간도 샬롬입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되살리고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 지인 권사님께 설교자인 저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 삶에서 나와 함께 동행 하고 계신 하나님을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무목적과 무의미와 무감동으로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건 교만한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분초마다 나에게 오셔서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기억해 내십시오.
다시 언급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수문 앞 광장 앞의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기억해 낸 고백은 감동의 감동을 줍니다.
본문 30-31절을 복기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을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또 주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의 영으로 그들을 경계하시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고도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교회 홈페이지 사랑방에 올려놓은 지난 주 담임목사가 쓴 글 한편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정말 교묘하게 유시민이 쓴 최근 작(作)인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돌베개 간』와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걸작인 『예언자들-삼인 간』을 교차로 독서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 작가는 대단히 냉소적인 무신론자고,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유대인 철학자이자 유대 종교 신학자다.
“인문학이 그런 노력(과학과의 통섭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거부한다면? 중세 기독교 신학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집합으로 전락할 수 있다. 현대 신학을 인문학으로 인정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유럽 중세 신학을 인문학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럽 중세 신학은 성서문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학문 연구를 탄압하고 사람을 불태워 죽인 행위를 정당화했다. 그런 이념 체계를 인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다.”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39쪽)
유시민의 이 글이 이성을 무시한 중세시대 종교의 무지와 독선, 그리고 폭력을 휘두른 것에 대한 철저한 후세의 응징처럼 다가왔다. 무신론자인 유 작가의 대단히 시니컬한 비평에 대해 유구무언 할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움이 잠시 내게 임했다. 하지만 극도의 예의를 갖춘 모양새이기는 했지만, 그가 말한 또 하나의 갈파에서 역설적으로 표현 때문에 도리어 감사(?)가 밀려왔다.
“현대 신학을 인문학으로 인정해야 할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예의를 갖춘 듯한 무신론자가 날린 신학에 대한 폄훼요 폭격이다. 그가 갖고 있는 무신론적인 사유와 사고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요 절제된 공격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날 섰다. 같이 읽고 있는 책,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이 그의 걸작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언자가 계시를 본 것은 단순히 경험하는 행위가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 된 행위라는 사실, 인류에게 보낼 사람을 찾으시는 그분에 의해서 노출되고 부름을 받고 압도당하고 사로잡힌바 된 것이라는 사실이 아마도 그가 본 계시임을 보여주는 표징인 듯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경험 내용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경험 내용이다.”(예언자들, 600쪽)
소름끼치게 하는 철학적, 신학적 사유다. 정말로 숨소리를 죽이게 하는 성찰이다. 유 작가가 이렇게 비유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뇌다.”(문과남자의 과학 공부, 48쪽)
이게 무신론적인 인문학과 과학의 한계다. 뇌 과학적인 연구 결과로 밝힌 뇌의 정체에 열광하는 자가 “하나님은 인간 경험 내용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경험 내용”이라는 성찰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다. 대단한 지성을 무기로 수많은 사람들을 논리로 열광시키는 내용들조차 뇌의 활동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유하심의 결과물이라는 헤셀의 한 마디가 나에게 적지 않은 위로와 감동을 준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는 자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서 경험하시는 내용이라는 이 엄청난 은혜에 대해 무지한데, 나와 여러분 같이 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지성의 소유자들에게 이 기막힌 은혜를 감각하게 하시니 얼마나 엄청난 감동이요, 은혜입니까?
하나님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마십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주의 은혜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갈한 나의 영혼을 생수로 가득 채우소서
피곤한 내 영혼 위에
내 주의 은혜 강가로 저 십자가의 강가로
내 주의 사랑 있는 곳 내 주의 강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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