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 관리자 | 2024-01-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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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설교제목 :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분 류 : 절기 예배 설교자 : 이강덕 목사 설교일 : 2023년 12월 25일 성경본문 : 누가복음 1:26-38 본문내용2023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 설교 본문: 누가복음 1:26-38 제목: 원인없는 결과는 없다. 서론) 그림을 하나 보겠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이라는 그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림 설명) 김기석 목사는 금년 초에 책을 하나 출간했는데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이라는 책입니다. 김 목사께서 위 그림 즉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에 대한 작품 설명을 이 책에 기록했는데 잠시 나누어보겠습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은 1857년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40대 왕성한 시기에 그린 작품인데도 그림의 분위기는 애잔합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세 여인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가난한 계층을 대변합니다. 여인들은 추수가 끝난 들판에 엎드려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수확한 것들을 무겁게 실어나르는 마차가 보입니다. 두 마리 말이 끄는 큰 마차입니다. 우측 상단 저 멀리 말을 탄 사람이 보입니다. 아마도 밭의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흰옷을 입은 채 수확에 여념없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으로 지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 옆에는 짚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까마득한 저 하늘 위로는 풍성한 수확을 함께 나누고 싶은 새들이 날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면의 3/4을 차지하는 공간의 주인공들은 여인들입니다. 이는 여인들이 하는 일의 존귀함을 나타냅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두 여인을 구분해 주는 것은 머리에 두른 두건의 색깔입니다. 파란색과 붉은색이 단조로운 풍경에 색채감을 부여합니다. 비록 빈곤하지만 그들이 절망의 심연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두 여인의 왼손 배치도 또한 절묘합니다. 한 여인은 이삭을 든 왼손을 등 뒤에 올렸고, 다른 여인을 무릎에 두었습니다. 여인들의 손은 투박합니다. 오른쪽에 선 여인은 이제 허리를 막 굽히려 합니다. 수확물을 담기 위해 엉덩이께에 끈을 동여맨 앞치마는 아직 비어 있습니다. 낯빛이 어두워보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의 모습은 대지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홍빛 하늘은 어쩌면 곤고한 노동 속에 깃든 희망이 아닐까요?” (김기석, 김기석, 『특별한 빛을 보내오는 사람들』, kmc, 21-22쪽) 그림에 관한 문외한(門外漢)인 제게 김 목사의 설명이 『이삭 줍는 여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림 설명을 끝낸 김 목사는 이 그림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이렇게 사족으로 달아 놓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 자리가 거룩함을 체현해야 할 자리입니다. 거룩한 일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정성으로 자기 삶을 살아내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밀레는 바로 그런 삶의 장엄함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김기석, 위의 책, 23쪽) 지난 목요일, 교단 규정위원회 모임차 천안을 다녀오는 길에 도로 노선 줄 긋기 공사를 하는 인부들을 보았습니다. 차량 계기판에 표시되는 실외 온도는 영하 10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이었기에 아마도 체감온도는 영하 15도를 훨씬 넘는 강추위 온도였을 것입니다. 너무 추운 날씨에 그것도 도로 복판이라는 한량에서 추위와 싸우며 본인의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김 목사의 글이 다시금 오롯이 떠올라 오늘 성탄절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소개했습니다.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에 등징하는 여린 여인 세 명은 왜 들에 나와 이삭을 주워야만 했을까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부양해야 식솔들을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영하 10도의 날씨에 도로 위 칼바람을 맞으며 고된 노동을 하는 인부들은 또 무엇 때문에 그 일을 감당했을까요? 그들 역시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 목사의 지적대로 결국 자기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대해 지극정성을 다하며 맡겨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거룩한 삶이자, 노동의 성직을 감당해 내는 모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평상적인 삶의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맞닥뜨린 현상은 일반적인 이해의 차원을 뛰어 넘는 기이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론) 엘리사벳이 요한을 잉태한지 6개월이 되는 어느 날, 가브리엘 천사는 이번에는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갑니다. 마리아는 본문 27절에서 밝혔듯이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처녀였습니다. 이런 이력을 갖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가서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도무지 말이 안 되며 더불어 마리아에게 그냥 재앙 그 자체가 되는 수태고지를 행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는 화려한 수사어구가 첨가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1-33절을 나누겠습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가브리엘 천사가 붙인 수사어구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마리아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녀에게는 개인적인 참화(慘禍)의 원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런 재앙을 겪지 않는 방법은 단지 천사의 고지를 거절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리아는 본문 34절에서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인데 어찌 이런 망극한 일이 내게 일어나겠느냐고 완곡한 거절을 합니다. 하지만 35절 본문에서 마리아의 이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가브리엘 천사는 이 일은 인간이 계획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사역임을 언급하며 도리어 마리아를 설득합니다. 설득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친족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어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가임기 여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라는 약속된 메시아가 올 길을 예비할 광야의 소리인 요한을 잉태한지 6개월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하고도 명징한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에 마리아는 설득당하고 맙니다. 이윽고 마리아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여성이 고백했던 신앙고백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학자들이 말하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본문 37-38절을 읽겠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리아가 말했다. 이제야 모두 알겠습니다. 나는 섬길 준비가 된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천사가 그녀를 떠나갔다.” 오늘 본문만 놓고 본다면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위대한 결과물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 마리아의 계산하지 않는 순종이 원인이었습니다. 마리아가 37-38절에서 고백한 고백을 과소평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 고백은 죽기를 각오한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가 무엇보다도 마리아에게 우선순위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정혼하기로 약속한 남자가 있는 여인이 정혼한 남자와의 육체적인 관계를 전제하지 않고 임신을 했다는 것은 당시 나사렛 지역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을 벗어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에게 가브리엘로 추측되는 천사가 와서 마리아의 임신은 불륜에 의한 죄악으로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성령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고지해주었지만, 나사렛이라는 마을 공동체에 있는 세속의 영역은 마리아에게 주홍글씨를 씌울 것이 너무 자명한 일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마리아에게는 치명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마리아는 자신이 일어날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읽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수용은 전적인 순종이라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마리아의 이 고백을 만나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남긴 유고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때론 말씀이 우리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망치와 같아서 우리가 아끼고 좋아하는 잘못된 생각을 박살 내기도 하고,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소중한 우상을 허물기도 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 영혼의 심장에 병이 생겨 하나님께 힘차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은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 내면의 근육이 탄력을 잃어 질기고 거칠어지는 때 말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신다는 점입니다. 내면의 딱딱함을 깨뜨리고 우리 영혼이 다시 유연하고 편안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저 선함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리로 불러내십니다.”(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 있는 사람, 39쪽) 말씀은 날선 검보다도 예리합니다. 말씀은 뾰족합니다. 찾아오신 주께서 내게 주는 말씀은 아프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선언에 전율하게 하는 감동이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소개한 유진의 고백을 참 좋아하는 이유는 이 대목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고지한 수태고지는 마리아에게 꼭 선한 말씀과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슴 아픈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리아가 수용하며 순종한 이유는 마리아가 믿은 밑힘의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아픈 말씀이 곧 자신을 치료하는 광선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가 고지한 대로 다른 동네에 살고 있는 친족 언니였던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방문하여 엘리사벳이 6개월 전에 임신한 상태임을 확인한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집에 3개월을 동거합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있는 동안 하나님이 철저히 일하고 계심을 보았고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리아는 이렇게 찬양을 돌립니다. 누가복음 1:46-55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마리아의 고백을 쓸어담다보면 가브리엘을 만났을 때의 두려움은 온데 간데 없이 없어졌고, 일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만이 보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시 한번 유진 피터슨 목사의 선언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예수님은 가슴 아픈 말씀으로 이 상태를 치료하십니다.” 예수의 탄생은 마리아의 전적인 순종이라는 원인을 담보합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이루실 하나님의 구속사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 복보다 큰 복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순종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자들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본문의 레마와 관련된 성경 내증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9:22절을 소개합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우리들이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에게 주께서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기사에 대한 마태복음 기자의 사족입니다. 본회퍼는 이 청년의 불순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일갈합니다. “청년이 버린 것은 순종과 함께 버린 믿음이었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83쪽) 본회퍼 목사는 왜 이렇게 순종이라는 단어에 집착했을까? 그의 신학적인 성찰을 조금 더 느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서 안에서 우리에게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이 전체 말씀을 통해 오직 순종하는 자에게만 믿음을 선사하시고 오직 믿는 자에게만 순종을 선사하는 분이시다.” (위의 책, 88쪽) 본회퍼의 유명한 신학적 해제입니다. 본회퍼는 확신했습니다. 믿음=순종이라는 것을. 이 공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저 역시 현장에서 배운 황금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빌립보서 2:5-8절 말씀은 성탄절 아침에 나를 울컥하게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도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기에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다는 성경의 근거가 감동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복종’이라는 번역한 헬라어 단어 ‘휘페코오스’는 문자적인 의미는 ‘자기 스스로 밑으로 내려가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를 쳐서 복종했다는 바울의 고유한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왜 순종입니까? 여전히 자기 마음 속에 자기가 살아 있는 자는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자기를 비우는 일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믿는 자는 자기를 비우는 복종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 전제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기뻐하는 2023년 성탄을 보내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감동받은 글감 하나 소개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지식으로 순종이라는 말을 알거나, 가슴의 훈장처럼 순명이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면, 그것은 그럴듯한 장식물일 뿐이다. 그것은 가슴에선 빛나지만 생명에는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매 순간 순종과 순명의 걸음을 우직하게 내딛는 것이다.”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 382쪽) 사랑하는 제천세인교회 교우 여러분! 성탄이라는 선물은 그냥 우연히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일어났던 일이 아닙니다. 분명한 원인이 있었던 결과물입니다. 성탄의 원인은 마리아가 전적으로 행한 순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순종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나는 이 진정한 성탄의 의미를 간직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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