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멋 신앙과의 결별 | 이강덕 | 2024-06-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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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17일 월요일 성서 일과 묵상 겉멋 신앙과의 결별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52편, 에스겔 31:1-11, 갈라디아서 6:11-18 꽃물 (말씀 새기기) 갈라디아서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유진 피터슨 목사는 참 귀하고 좋은 선물을 후배들에게 남겨 놓았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메시지』가 그렇다. “할례의 방식을 여러분에게 강요하려는 자들에게는 오직 한 가지 동기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손쉬운 방법으로 남들 앞에서 좋게 보이려고 할 뿐, 믿음으로 살겠다는 용기,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할 용기는 없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평생을 달려온 나로서 부단히 싸웠고 또 싸웠던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싸울 영적 투쟁의 내용이 있다. 겉멋 신앙이다. 이제 육십 중반에 다다랐기에 젊은 시절, 의분이라고 생각해서 양보하지 않았던 웬만한 비본질적 목양의 껍질은 거의 내려놓았다. 거의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말한다.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직도 칼날 시퍼렇게 갈고 싸우는 싸움이 겉멋 신앙인들과의 싸움이다. 겉멋 신앙인들의 차라리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는 게 옳다. 공동체를 와해시키는 원흉들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표피적인 삶이 아니다. 신앙은 신앙인의 길을 걷는 자들의 진솔한 내면이다. 남은 자 시대로 돌입하는 한국교회의 지경이다. 끝까지 남을 자는 진정성 있는 애통함과 겉멋 신앙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 실천한 자들이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를 와해시키고 공격한 이들이 주장한 것은 할례 시행이다. 하지만 바울은 알았다. 그들의 底意가 할례 시행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에 대한 부담감을 회피하려는 꼼수였다는 것을. 성서 일과 묵상으로 적용하여 표현한다면 내면적 신앙의 신실함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치부를 들키지 않기 위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 비본질적인 겉멋으로 포장한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바울이 경고한 셈이다. 할례는 무늬다. 속 본질은 십자가다. 십자가를 회피하는 신앙은 가짜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를 유린했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성서 일과 앞에서 숙연해진다. 겉멋 신앙과 치열하게 싸우기로. 겉멋 신앙과 완전히 결별하기로. 두레박 (질문) 나는 겉멋 신앙의 그림자를 동경하는 것은 아닐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존귀하신 하나님, 겉멋 들이기에 마음을 쏟고 있다면 완전히 결별하게 하옵소서. 흔적도 남기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날이 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내 사랑하는 교회에 있는 아픈 손가락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저들이 진정성이 있는 십자가 믿음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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